Essay

모습《마리 앙투아네트 스타일》, 국립중앙박물관

마리 앙투아네트 스타일국립중앙박물관 · 용산(국립중앙박물관)2026년 12월 18일 ~ 2027년 3월 31일
이미지: 국립중앙박물관 《마리 앙투아네트 스타일》 전시 포스터. 그림은 조르주 바르비에 〈술래잡기〉(《Falbalas et Fanfreluches》 수록), 파리, 1922–1926 ©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일이 빼곡한 날에 나는 그림을 그린다. 글을 쓴다. 웹사이트를 한 부분씩 만들어 간다. 하나를 끝내야 다음으로 넘어간다. 하나하나 보기 좋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어떻게 하면 더 잘 만들지를 생각한다. 저녁이 되면 하루가 알찼다고 느낀다. 아무 일정도 넣지 않는 날도 있다. 끝내야 할 것이 없고, 누구에게 보여 줄 필요도 없다. 그런 날에는 밥을 하고, 밥을 먹고, 집을 치운다. 그것을 마치면 하루도 지나간다.

18세기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도 이런 두 가지 날이 있었다. 다만 그는 그 두 날을 두 곳에서 보냈다. 한 곳은 베르사유 궁전이다. 다른 한 곳은 궁전 정원에 지은 마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A)과 함께 여는 《마리 앙투아네트 스타일》은 두 가지를 보여 준다. 하나는 왕비가 살아 있을 때의 옷과 장신구와 식기다. 다른 하나는 그 뒤 200여 년 동안 왕비에게서 영향을 받은 이들이 만든 옷과 작품이다. 왕비는 직접 옷을 짓지 않았다. 그런데 왕비의 취향은 유행이 되었다. 그 유행이 200년 넘게 이어졌다. 패션 브랜드는 그의 스타일을 특히 좋아한다. 디올과 샤넬이 그 스타일로 옷을 만들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에는 이름이 아예 ‘마리 앙투아네트’인 웨딩드레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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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때의 초상화가 한 점 있다. 그림 속의 그는 머리를 높이 올렸다. 뺨이 발그레하다. 목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둘렀다. 드레스의 목선에는 분홍 꽃이 가득 수놓여 있다. 1773년의 그림이다.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 왕세자에게 시집온 지 3년째였다. 이듬해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했다. 그는 왕비가 되었다.

이미지: 요코하마미술관 프랑수아 위베르 드루에 〈궁정 드레스 차림의 마리 앙투아네트〉, 1773,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장 ©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이미지는 같은 전시의 요코하마 전시 공식 페이지에서)

그 시대 프랑스 왕비에게는 정치적 권력이 없었다. 사람들이 왕비에게 바란 것은 보이는 일이었다. 왕이 사는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왕비의 기상도, 화장도, 식사도 공개된 의식이었다. 곁에는 늘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 왕비가 무엇을 입는지는 본래 많은 사람의 관심사였다. 다만 왕비가 날마다 입을 옷은 관례대로 의상 담당 시녀가 정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스스로 정하고 싶어 했다. 모자와 옷 장식을 만드는 패션 상인 로즈 베르탱을 궁으로 직접 불러 의논했다. 그래서 베르탱에게는 ‘패션 장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왕비의 의상 장부에는 그가 당부한 말이 남아 있다. 드레스 한 벌은 남편의 눈과 같은 색으로 지을 것. 또 한 벌에는 정원에서 가장 좋아하는 꽃을 수놓을 것. 사람들이 왕비를 따라 입은 것은 그 옷을 왕비가 직접 골랐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왕비로 있던 몇 해 동안, 마침 파리에서 패션 판화가 나오기 시작했다. 종이 한 장에 최신 차림을 한 사람을 찍는다. 그 위에 손으로 색을 칠한다. 그래서 궁정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도 새 머리 모양과 모자가 어떤지 볼 수 있었다. 왕비가 고른 차림은 금세 유행했다. 프랑스에서만이 아니었다. 나라 밖 사람들도 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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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고른 것이 모두 초상화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정식 궁정 드레스에는 고래수염으로 받친 코르셋이 들어간다. 치마는 파니에로 양옆으로 넓게 벌린다. 뒤로는 무거운 옷자락이 끌린다. 그는 이 옷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 방에 돌아오면 서둘러 갈아입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에는 프티 트리아농이라는 작은 궁이 있다. 루이 16세가 즉위하던 해에 왕비에게 준 곳이다. 그곳에서는 궁정의 예법을 잠시 피할 수 있었다. 자기가 고른 친구 몇 사람하고만 지낼 수 있었다.

이미지: 국립중앙박물관 《마리 앙투아네트 스타일》 전시 포스터. 그림은 로브 아 라 프랑세즈, 프랑스, 1760년대 ©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뒤에 그는 프티 트리아농 정원의 북쪽에 건축가를 시켜 마을을 하나 지었다. 먼저 인공 호수를 만들었다. 호숫가를 따라 집을 지었다. 모두 3년이 걸렸다. 집은 다 시골집 모양으로 지었다. 마을 한가운데 개울에는 돌다리가 있다. 다리 한쪽은 손님을 맞는 곳이다. 그곳 방앗간에는 물레방아가 있다. 하지만 물레방아는 장식일 뿐이다. 농가는 겉은 시골집인데 안에는 공들인 가구가 놓였다. 다리 건너편은 진짜 농장이다. 곳간, 유제품을 만드는 곳, 양 우리, 닭장이 있다. 늘 돌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 농장은 그가 꼭 지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의 아이들은 여기서 밭일과 가축을 배웠다. 많은 사람이 왕비가 이 마을에서 농부 아낙 흉내를 냈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산책을 하고 손님 몇과 조촐하게 어울리러 왔다.

왕비는 본래 보여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마을은 밖에서 볼 수 없는 곳이었다.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왕비가 청한 손님뿐이었다. 여기서 그는 왕비가 아니어도 되었다. 다만 이 소박한 곳을 지으려면 먼저 호수를 만들어야 했다. 3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가 마을에 머무는 날이 늘었다. 밖의 사람들은 왕비를 볼 수 없었다. 그를 향한 비판도 따라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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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이 넘도록 세대마다 그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들려주었다. 영화와 드라마로 만든 것만 서른 편이 넘는다. 2006년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는 18세기 궁정에 오늘의 대중음악을 틀었다. 식탁에는 알록달록한 마카롱과 케이크가 접시마다 쌓였다. 영화 속 왕비의 구두는 구두 디자이너 마놀로 블라닉이 이 영화를 위해 디자인했다. 이 영화는 뒤에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이 극장에서 그를 만났다.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는 본래 일본 작품이다. 서울에서는 2014년에 처음 올랐다. 한국판의 각색이 흥미롭다. 원작의 주인공은 가상의 평민 여성 마그리드 아르노다. 그런데 한국 관객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더 궁금해했다. 그래서 제작진은 이야기의 중심을 왕비로 옮겼다. 이 작품은 2024년까지 서울에서 모두 네 번 공연되었다.

일본의 독자는 대개 만화로 그를 알았다.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는 고등학생 때 그의 전기를 읽었다. 언젠가 그 일생을 그리겠다고 그때 마음먹었다. 제목까지 미리 지어 두었다. 《베르사유의 장미》(대원씨아이, 2009)다. 이 만화는 1972년 일본의 소녀 만화 잡지에서 연재를 시작했다. 뒤에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무대에 올렸다. 본 관객이 500만 명을 넘는다. 2024년에는 서울에서도 뮤지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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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의 디자이너들도 왕비의 스타일로 새 옷 짓기를 무척 좋아한다. 1920년대, 파리의 디자이너 잔 랑방은 흰 이브닝드레스를 만들었다. 아주 얇은 천을 썼다. 어깨와 치마에는 색색의 비단 꽃다발을 달았다. 치맛자락은 양옆으로 벌어진다. 마리 앙투아네트 시대의 치마와 닮았다. 2006년에는 디올의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가 이브닝코트를 만들었다. 코트에는 왕비의 초상이 찍혀 있다.

이미지: 요코하마미술관 잔 랑방 〈이브닝드레스 ‘로브 드 스틸’〉, 1922–23년경,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장 ©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이미지는 같은 전시의 요코하마 전시 공식 페이지에서)

당시 사람들은 그의 옷차림을 따라 하면서 그가 사치스럽다고 말했다. 이렇게 화려한 모습 때문에 뒤에 그 유명한 말이 생겼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백성에게 먹을 빵이 없다는 말을 듣고 왕비가 한 대답이라고 한다.

사실 이 말은 그가 한 말이 아니다. 이 말은 프랑스 작가 루소의 책에 처음 나온다. 거기서는 ‘어느 지체 높은 공주’의 말이다. 그 책이 쓰일 때 그는 아직 오스트리아에 사는 아이였다. 그가 사치스러웠는지, 좋아하는 것에 공을 들였을 뿐인지는 200년 넘게 말이 엇갈린다. 그래서 나는 왕비의 마을이 가장 궁금해졌다. 집에 돌아와 누구도 아니어도 될 때 사람은 편안하다. 왕비에게도 그런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만 그의 그런 곳은 가장 화려한 궁전 곁에 지은 마을 하나였다. 어쩌면 그곳의 그가 진짜 그였을지 모른다. 어쩌면 이 마을을 지은 일이 그의 반항이었을지도 모른다.

왕비의 마을은 짓는 데 3년이 걸렸다. 먼저 호수를 만들고, 그 호숫가를 따라 집을 지어야 했다. 꾸미지 않은 날이 꾸미지 않은 채로 지나가려면 그는 먼저 그날을 설계해야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소박한 날에는 호수가 필요 없다. 밥을 하고, 밥을 먹고, 집을 치우는 일은 언제든 할 수 있다. 다만 일정이 빼곡한 몇 주 동안에는 그날을 위해 먼저 하루를 비워 두어야 차례가 온다.

직접 가서 보았으면 좋겠다. 《마리 앙투아네트 스타일》.

— Yu

마리 앙투아네트 스타일국립중앙박물관 · 용산(국립중앙박물관)2026년 12월 18일 ~ 2027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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